인피니트 스트라토스 Infinite Stratos (2011) ★★ 잡상



인피니트 스트라토스 Infinite Stratos (2011) ★★


원작 / 출판사

유미즈루 이즈루(弓弦イズル) / MF문고J(MF文庫J)


감독 / 제작사
키쿠치 야스히토(菊地康仁) / 에이트 비트(エイトビット)


방영횟수
총 12회 + OVA 1회


한국 방영 정보
애니플러스(Aniplus) 한국어 자막판 동시방영(2011)


출연
우치야마 코우키(内山昂輝) … 오리무라 이치카(織斑 一夏)
히카사 요코(日笠陽子) … 시노노노 호키(篠ノ之 箒)
유카나(ゆかな) … 세실리아 얼콧(セシリア・オルコット, Cecilia Alcott)
시모다 아사미(下田麻美) … 팡 링인(凰 鈴音)
하나자와 카나(花澤香菜) … 샬롯 듀노아(シャルロット・デュノア, Charlotte Dunois)
이노우에 마리나(井上麻里奈) … 라우라 보데비히(ラウラ・ボーデヴィッヒ, Laura Bodewig)
토요구치 메구미(豊口めぐみ) … 오리무라 치후유(織斑 千冬)
시타야 노리코(下屋則子) … 야마다 마야(山田 真耶)
타무라 유카리(田村ゆかり) … 시노노노 타바네(篠ノ之 束)



저는 여러 여자들이 겉보기에 아무 매력도 없는 한 남자를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붙어 다니면서 난리치는 이러한 장르의 애니메이션이 그 자체로 “급이 떨어진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틀에 박힌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그 이야기를 일단 틀에 “제대로” 박아 넣는다면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니까요. 이는 애니메이션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오히려 애니메이션 시청자들이야말로 이런 형태의 “수작”에 가장 평가가 박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에드가 앨런 포나 J. R. R. 톨킨처럼 그 틀을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기라도 한다면 최고가 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기존에 주어진 어법이나 규칙을 충실히 따라가도 얼마든지 좋은 즐길 거리는 탄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규칙을 조금 비틀어서 독창적이고 신선한 느낌을 준다거나, 여러 장르의 관습을 자유롭게 넘나든다거나, 장르를 이야기하면서도 보다 보편적인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는 물건을 만든다면 오죽이나 좋겠지만, 그런 작품은 1년에 한 개도 나오기 어려울 겁니다. 너무 높은 기준이죠.


그렇다면 인피니트 스트라토스는 하렘(harem)물의 왕도를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 작품은 실패한 하렘물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작품은 하렘물이라는 주어진 틀에 자기 자신을 제대로 때려 박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야기가 매우 엉성합니다. 하렘물에 무슨 이야기 타령인가 싶을 수도 있는데, 하렘물의 기본은 여러 여자가 “멋도 없고 재미도 없지만 착한 남자 하나”에게 뿅뿅 하트를 날려대는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것입니다(여기서 “설득력 있게”란 이른바 “소설의 진실성”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진실성을 따진다면 애초에 하렘물 같은 장르가 성립되기도 어렵겠죠). 그리고 그 설득력은 남주인공의 단편적인 매력, 예쁘고 귀엽고 가슴 크고(혹은 작고) 성격도 좋은(내지는 각양각색인) 여주인공들이 이 남자에게 빠져드는 과정의 구체적인 서술, 그 과정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담아낼 만한 갈등의 존재 여부와 그 완성도라는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남주인공부터 보도록 할까요? 오리무라 이치카는 이 장르의 위대한 선배인 모리사토 케이이치(“오! 나의 여신님”)나 최근작 중 참고할 만한 캐릭터인 유우키 리토(“toLove 트러블”)와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입니다. 기본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에다,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고, 여자들이 달려들어도 목석마냥 자기 할 일에 충실하고, 그러면서도 성격은 무난한 그런 캐릭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만 우글우글한 사관학교에 들어온 이 남자 캐릭터의 완성도는 모리사토나 유우키에 비해 상당히 부족합니다. 모리사토와 유우키는 숫기가 없고 아주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단편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의 남성들이 대부분 결여하고 있는 여자에 대한 진심어린 배려라는 무기죠(이런 무기가 아무에게나 갖춰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는 것도 오타쿠 마케팅에서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오! 나의 여신님”과 “toLove 트러블”에서 이러한 단편적인 매력들은 아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일상적인 묘사를 통해 조금씩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묘사가 조금씩 쌓이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 설득력도 조금씩 생겨나죠.


하지만 본 작품의 목석 오리무라 이치카에게 그런 매력이 있는가, 내지는 그런 매력을 드러낼 만한 에피소드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단 말입니다. 이 친구는 일단 착해 보이고, 여자에게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최소한의 배려심을 드러내는 장면도 부족하고, 여자 캐릭터들이 몰입하게 되는 계기를 제대로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로또 당첨과도 같은 확률과 누나의 빽으로 여자들만 다니는 학교에 들어와서는 그냥저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고등학생에 불과합니다. 한 마디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매력적인 여자 캐릭터들이 이 친구에게 빠져드는 과정 역시 뭔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무슨 추리소설 급의 논리성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장르 안의 법칙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다섯 명이나 되는 여자들 중에서 “최소한의” 개연성을 갖춘 스토리가 있는 캐릭터는 샬롯 듀노아 한 명뿐입니다. 소꿉친구 1(시노노노 호키)과 소꿉친구 2(팡 링인)이야 그렇다고 쳐도(이것도 한심하지만), 일관성 있게 주인공을 무시하던 세실리아 얼콧이나 주인공을 거의 원수 취급하던 라우라 보데비히가 주인공의 사랑 쟁탈전에 투입되는 과정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개연성은 당연히 없고,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에 대한 묘사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큐피드가 쏜 화살을 맞은 여자들도 이 정도로 그냥 남자를 사랑하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본작의 킬러 캐릭터, 샬롯 듀노아


마지막으로 줄거리 전반입니다. 사실 설정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각국 정부가 개발제한협정을 마련할 정도로 파괴력 있는 무기를 여자들만 몰 수 있게 되었다는 배경은 여전히 불만스럽지만, 그래도 넘어가 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배경을 무기 삼아 우리의 남주인공은 세계의 우수한 형질을 가진 여자들이 모두 모여드는 사관학교에서 다양한 국적의 알록달록한 여자들과 자연스럽게 교제할 수 있게 되니까요. 게다가 남주인공이 자기가 모는 기체를 통해 연습시합에서 여주인공을 패배시키는 과정 등의 묘사는 그 자체로 성적인 은유를 거리낌 없이 활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나를 쓰러뜨리다니 정말 대단해. 이치카 군…….” 이런 식으로 말이죠. 무슨 바다표범 무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까지 들 지경입니다.


문제는 이런 설정을 가지고 이야기를 제대로 전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 작품은 메카닉 애니메이션의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냥 학교가 아니라 특수한 목적을 지닌 사관학교라는 점, 주인공들이 조종하는 기체의 특성을 다양하게 만들어서 스토리를 다채롭게 만들 수 있다는 점, “외부의 적”과 같은 요소를 통해 주인공과 여캐릭터들의 심리적 일체감을 굳건히 할 수 있다는 점 등의 무한한 가능성은 죄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엉성하게 지나가거나, 아예 무시되어 버립니다. 사관학교의 분위기는 그냥 학교나 진배없고, 메카들은 뭔가 차이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을 주며, 심각한 요소는 마지막에 잠깐 나오긴 나오는데 그 완성도 역시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애니메이션은 하렘물로서의 장점이 아예 없는가? 그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DVD와 블루레이를 합쳐 각 권 당 평균 3만 장을 넘기는 말도 안 되는 판매량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답은 여자 캐릭터들의 “속성”에 있습니다. 사실 스토리가 망가진 하렘물에서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여기뿐이죠. 불행 중 다행으로 여자 캐릭터들의 애니메이션 디자인은 최소한 중간 이상은 가고, 성격적 속성도 그럭저럭 다양하게 부여된 편이며, 무엇보다도 “국적”이라는 뚜렷한 요소가 있습니다. 특히 바보스러울 정도로 고정관념에 충실한 영국, 프랑스, 독일 출신 여학생들의 묘사는 장르 내의 기준에서는 그다지 나쁘지 않습니다. 영불동맹을 연상시키는 장면에서는 실소가 나오긴 했지만.

영불동맹의 순간


또 하나의 원동력은 성우입니다. 사실 연기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이것 역시 별로 좋은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는 성우들의 연기가 나빠서라기보다는 원작의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겠죠. 다섯 명의 여성 연기자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내고 있습니다. 특히 라우라 보데비히 역의 이노우에 마리나가 좋습니다. 귀엽게 보이려고 애쓰는 연기나 있어 보이는 척하는 연기나 모두 이 캐릭터에게 요구되는 특유의 어색함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히카사 요코, 유카나, 하나자와 카나는 그녀들이 출연한 기존의 다른 작품을 기준으로 이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을 만큼을 딱 해 줍니다(팡 링인 역의 시모다 아사미는 불행히도, 판단이 어려울 정도로 캐릭터의 비중이 낮았습니다).


인피니트 스트라토스는 그렇게까지 못 만든 작품은 아닙니다. 아무리 팬들이 시류에 잘 휩쓸리고, 이제는 거의 공식화된 캐릭터들의 매력 포인트만 쫓아다닌다고 해도, 본 작품의 판매량은 작품의 완성도와 “어느 정도는” 연관이 있습니다. “배트맨과 로빈”이 1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한 것이나, “디 워”가 800만을 동원한 것과 동일시하기는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작품이냐 실패한 작품이냐, 혹은 잘 만든 작품인가 그냥 그런가에 대해 대답하라면 저는 여전히 이 애니메이션에 좋은 점수를 주긴 어려울 듯하네요. 사실 진짜 문제는 “그래, 그 정도 장점이라도 있으면 어느 정도 팔리는 거야 뭐 이유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하고 기준을 자꾸 낮추게 되는 재패니메이션의 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족
저는 이 작품의 원작을 본 적이 없습니다만, 가만히 보면 원작을 보신 분들의 의견도 저와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재미있는” 연기를 보여 준 연기자는 시노노노 타바네 역의 타무라 유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목소리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같은 역할을 해 보면 괜찮을 것 같네요.


캐릭터들의 이름 표기가 좀 이상합니다. 세실리아 얼콧이야 영국식 발음과 미국식 발음의 차이이고, 팡 링인은 원작부터 “황”이 아닌 “팡”으로 써 놓았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Laura Bodewig는 아무리 봐도 “라우라 보디비히”는 아니죠.


글을 쓰면서 엔딩 곡을 주연 성우들(물론 전원 여자)이 라이브로 커버한 동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팬들의 추임새가 소녀시대의 kissing you에서 소덕들의 함성 정도는 뭐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무서운 양반들입니다.


팬덤에서 샬롯 듀노아의 인기가 제일 높은 거야 이해가 갑니다만, 개인적으로 그 친구는 뭐랄까, 여우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성품이 착하고 다른 여자아이들도 배려할 줄은 아는 것 같은데, 그게 순수한 마음의 발로라기보다는 뭐랄까 계산된 여우짓 같달까요?


관련 링크
공식 홈페이지(http://www.tbs.co.jp/anime/is/index-j.html)
영어 위키피디아(http://en.wikipedia.org/wiki/Infinite_Stratos)
일본어 위키피디아(http://ja.wikipedia.org/wiki/IS_%E3%80%88%E3%82%A4%E3%83%B3%E3%83%95%E3%82%A3%E3%83%8B%E3%83%83%E3%83%88%E3%83%BB%E3%82%B9%E3%83%88%E3%83%A9%E3%83%88%E3%82%B9%E3%80%89)
인피니트 스트라토스 위키(http://infinite-stratos.wikia.com)


노다메 칸타빌레 のだめカンタービレ (2007, 2008, 2010) ★★★★ 잡상



노다메 칸타빌레 のだめカンタービレ (2007, 2008, 2010) ★★★★


원작 / 출판사
니노미야 토모코(二ノ宮知子) / 코단샤(講談社)


감독 / 제작사
카사이 켄이치(カサヰケンイチ, 1기), 콘 치아키(今千秋, 2기 이후) / J. C. STAFF


방영횟수
총 45화(1기: 23화, 2기: 11화, 3기: 11화)


한국 방영 정보
애니맥스(Animax) 한국어 더빙 방영(2009, 2011-2012)


출연
카와스미 아야코(川澄綾子) / 윤여진 … 노다 메구미(野田 恵)
세키 토모카즈(関 智一) / 송준석 … 치아키 신이치(千秋 真一)
오가와 신지(小川真司) / 장광 … 프란츠 폰 슈트레제만(フランツ・フォン・シュトレーゼマン)
카와다 신지(川田紳司) / 김기홍 … 미네 류타로(峰 龍太郎)
후지타 요시노리(藤田圭宣) / 안용욱 … 오쿠야마 마스미(奥山 真澄)
코바야시 사나에(小林沙苗) / 홍소영 … 미키 키요라(三木 清良)
마츠카제 마사야(松風雅也) / 신용우 … 쿠로키 야스노리(黒木 泰則)
나카이 카즈야(中井和哉) / 문관일 … 에토 코조(江藤 耕造)
이토 시즈카(伊藤静) / 채의진 … 타티아나 비시뇨바(タチヤーナ・ヴィシニョーワ)
아사누마 신타로(浅沼晋太郎) / 박성태 … 프랑크 랑투안(フランク・ラントワーヌ)
히노 사토시(日野聡) / 이지환 … 리 윤롱(李 雲龍)
오오하라 사야카(大原さやか) / 김현지 … 손 루이(孫 Rui)
키요카와 모토무(清川元夢) / 신용우 … 샤를 오클레르(シャルル・オクレール)



먼저 제가 이 장르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넘어가야겠습니다. 한국에서 “남자아이”로서 자란 남성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저도 10대 시절 순정만화는 “여자애들이나 보는 것” 정도로 생각했으니까요. 이런 고정관념은 그 옛날 초등학교 교실에서 돌아다니던 “오렌지 보이”의 줄거리를 우연히 듣게 되면서 더욱 강해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긴 일입니다.

노다메 칸타빌레의 장르를 순정만화라고 한다면, 이 작품은 순정만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엄친아인 남주와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더 엄친딸인 여주가 도쿄와 파리를 종횡무진하며 사랑 아닌 사랑을 펼치는 이 만화는 코단샤 역사상 초판 판매부수 100만 부를 넘긴 두 작품 중 하나이며(다른 하나는 저 유명한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배가본드”입니다), 애니메이션은 후지TV의 심야 애니메이션 방영 프로젝트인 노이타미나(noitamina) 역사상 단일 에피소드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고, 이 애니메이션보다 조금 먼저 만들어진 드라마는 역시 같은 방송국의 프라임 타임 드라마인 게츠쿠(月9)에서 대성공을 거둡니다. 당시 군 복무 중이던 저도 군대에서 이 작품을 드라마로 먼저 접했고, 휴가를 나와 보니 노다메 피아노 가방을 들고 다니던 여성들을 최소 세 명 이상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노다메 칸타빌레를 전형적인 순정만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이 장르에 친숙하지 못하므로 뭐라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클리셰에 비추어 보면, 노다메 칸타빌레는 순정만화의 왕도를 그대로 따라가는 듯 하면서도 무언가 묘하게 비틀린 모습을 보여 줍니다. 전형적인 순정만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잘 생기고, 무엇 하나 빠진 것 없는데다가, 성격까지 완벽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완벽히 파탄자인 왕자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이해하기 어려운 동기를 가지고 있거나, 무조건적이거나, 심지어는 동정적이기까지 합니다.


반면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노다메와 치아키의 사랑 아닌 사랑은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치아키는 노다메의 지저분한 일상생활과 무모한 대시에 질려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빛나는 음악적 재능에 반합니다. 또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노다메와 달리 치아키는 작품 전체의 거의 끝까지 자기감정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긴장관계가 이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애초에 이야기의 작가적 시점이 사실상 치아키의 1인칭 주인공 시점에 가깝기도 합니다. “꽃보다 남자”를 구준표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수영장의 오리 신은 어떻게 될지 정말로 궁금하기도 합니다만) 아마도 엉망이 되지 않을까요. 노다메 칸타빌레가 순정만화 장르의 역사에 기여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점일 것입니다.


원작자인 니노미야 토모코가 살려 놓은 이 미묘한 긴장을 J. C. STAFF의 감독들은 꽤 성공적으로 영상화합니다. 굉장히 시크한 니노미야 여사의 그림은 애니메이션의 작화에서는 다소 동글동글해지고 무난해지며, 몇몇 장면에서는 찌질해지기까지 합니다. 노다메와 치아키의 바보스러운 행동은 움직임이 가미되면서 더 바보스러워집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이렇게 캐릭터들을 망가뜨리되, 로맨틱 코미디의 어법을 철저히 지키면서 망가뜨립니다. 애니메이션다운 과장이 나오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이 작품은 콘티 하나하나를 그대로 실사 드라마로 옮겨도 괜찮을 정도입니다. 매 에피소드마다 유머는 존재하지만, 도가 지나친 만화적 과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사 드라마 이야기가 나왔으니 어쩔 수 없이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드라마판과의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노다메 애니메이션의 제작자들은 어쩔 수 없이 대성공을 거둔 동명의 드라마에 대해 심적 부담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 애니메이션은 돈의 힘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오케스트라 연주 신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오히려 드라마보다 훨씬 낫습니다. 무엇보다도 노다메 드라마는 “만화적으로 웃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선입견에서 나온 과장된 연출기법은 원작 전체의 미묘한 밸런스를 순식간에 망가뜨립니다. 캐릭터로 가면 더 심해집니다. 바보 같지만 섬세한 일면을 가진 인물인 노다메는 그 바보스러움만 제대로 살아났고, 버럭버럭 소리만 지르는 것보다는 완벽주의와 순진함이 결합된 성격이 강조되어야 할 치아키는 거의 반쯤 개그 캐릭터가 되고 맙니다. 물론 저는 이러한 실패가 주연배우인 우에노 쥬리와 타마키 히로시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감독의 지시에 충실하게 연기를 했고, 이는 그 자체로만 보면 훌륭합니다. 단지 감독의 연기지도가 심하게 잘못되었을 뿐이죠.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은 드라마 자체의 완성도보다는 원작의 완성도 덕분입니다.


그에 비해 애니메이션의 연출과 연기는 움직이는 그림답게 적절한 과장을 넣되, 원작의 미묘한 밸런스는 대단히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연 성우인 카와스미 아야코와 세키 토모카즈의 연기는 본 작품의 완성도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영화에서도 SF나 액션에 비해 드라마 장르에서 배우들의 역할이 훨씬 중요한 것처럼, 로맨틱 코미디 애니메이션으로서 본 작품의 성우들의 역할도 절대적입니다. 그리고 카와스미 아야코와 세키 토모카즈는 오랫동안 많은 작품에서 연인을 연기한 콤비답게 거의 “완벽”에 가까운 플레이를 보여 줍니다.


카와스미 아야코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 여자 성우치고는 연기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그녀의 발성은 불안정하고, 발음 또한 명확하지 못한 면이 곳곳에서 엿보입니다. 그러나 노다메 연기에서 이러한 단점은 오히려 장점이 됩니다. すごい를 “슈고이”로, すてき를 “슈테키”로 말하는 그 혀 짧은 바보스러움은 완벽히 노다메입니다. 게다가 왠지 모를 징그러움이 있는 우에노 쥬리보다 훨씬 사랑스럽죠. 버럭거리는 연기의 1인자라고 할 수 있는 세키 토모카즈의 매력 또한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타마키 히로시의 치아키는 이 캐릭터 특유의 시크함이 다소 결여된, 흔한 로맨틱 코미디의 남주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세키 토모카즈의 치아키는 음악에서는 날카롭되, 연애에서는 바보스러운 “완벽한 엄친아 같지만 사실은 반쯤 엄친아”인 모습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오가와 신지의 프란츠 폰 슈트레제만 또한 완벽합니다. 드라마에 나온 그 가발 쓴 아저씨는 웃기기는 한데 뭔가 웃기기만 하죠(타케나카 나오토의 연기를 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비해 애니메이션의 프란츠 폰 슈트레제만은 능글맞으면서도 뭔지 모를 깊이를 가진 본래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음악은 어떨까요? 일단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은 예산의 한계 때문인지는 몰라도, 본 작품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모션 캡처를 활용한 1기는 캐릭터의 얼굴이 나오는 장면은 정지화면으로, 악기 연주가 나오는 화면은 캐릭터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은 채 손의 움직임만 보여 주었기 때문에 굉장히 어색합니다. 조금 더 돈을 받았는지, 그동안 기술이 발전했는지 모르지만 2기 파리편부터는 이런 괴상한 연출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은 떨칠 수 없습니다. 다만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연주들, 예컨대 1기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이나 2기의 모차르트 피아노 변주곡 “아! 어머님께 말씀드리죠”, 피날레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 장면은 나쁘지 않습니다.


반면 음악 그 자체의 사용은 괜찮은 수준입니다. 물론 클래식의 폭격이라고 할 만한 드라마판에 비해, 본 작품은 작품 내에 등장하는 클래식 이외에는 고전음악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촐한 매력을 잘 살려야 하는 애니메이션의 입장에서 이는 불가피한 선택일 뿐만 아니라, 최선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노다메 칸타빌레는 음악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로맨틱 코미디 애니메이션입니다. 이러한 작품에서 클래식 음악의 1차적인 역할은 인물의 성격, 배경으로서의 음악대학의 특성, 그리고 각 장면을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도구입니다. 원작의 연주곡을 거의 그대로 옮기고, 이외의 클래식은 개그하는 장면에나 가끔 리믹스로 집어넣은 노다메 애니메이션은 그래서 괜찮은 작품입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이 작품에서 주객전도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클래식을 알기 위해 노다메 칸타빌레를 본다면 왠지 서글프지 않은가요.


노다메 칸타빌레 애니메이션은 그야말로 대박을 치며 사회 전반에서 유명해진 드라마에 비하면 소박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애니메이션의 완성도가 드라마에 비해 떨어져서가 아닙니다. 노다메 애니메이션은 동일한 장르(애초에 20대 학원연애물이 많지도 않지만)에서 쉽게 비교대상을 찾기 어려운 탁월한 작품이고, 후일 비슷한 계열의 작품이 또 만들어진다면 레퍼런스가 될 수 있을 만큼 모범적입니다. 한 마디로, 오래 간직하면서 두고두고 즐길 만한 좋은 애니메이션입니다.



사족
드라마판을 너무 혹평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사실 드라마판도 1기까지는 그럭저럭이었습니다. 몇 가지 단점이 거슬릴 뿐이었죠. 하지만 신춘특집 파리편에서 뭔가 불안한 징조가 보이더니, 영화로 제작된 피날레에서는 극장에 앉아 있기가 민망할 정도로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영화로 나와서 돈 주고 볼 사람들만 보는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요.


애니메이션이 1기, 파리편, 피날레로 나뉘어 연도별로 띄엄띄엄 방영된 것은 2기 이상의 시리즈물을 대체로 허용하지 않는 노이타미나의 정책 때문입니다. 오히려 꾸역꾸역 3기까지 방영 완료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의 인기와 완성도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겠죠.


오프닝과 엔딩에 사용된 음악들도 대체로 좋습니다. 제가 추천하는 곡은 1기 오프닝인 “Allegro Cantabile”와 3기 엔딩인 “바람과 언덕의 발라드”입니다.


관련 링크
공식 홈페이지(http://www.nodame-anime.com)
한국어판 공식 홈페이지(http://www.animaxtv.co.kr/shows/NodameCantabile)
영어 위키피디아(http://en.wikipedia.org/wiki/Nodame_Cantabile)
일본어 위키피디아(http://ja.wikipedia.org/wiki/%E3%81%AE%E3%81%A0%E3%82%81%E3%82%AB%E3%83%B3%E3%82%BF%E3%83%BC%E3%83%93%E3%83%AC)


페이트 제로 Fate/Zero (2011-2012) ★★★☆ 잡상



페이트 제로 Fate/Zero (2011-2012) ★★★☆


원작
우로부치 겐(虚淵玄) / TYPE-MOON


감독 / 제작사
아오키 에이(あおきえい) / 유포테이블(ufotable)


방영횟수
총 25회(1회 평균 상영시간 23분)


한국 방영 정보
TV: 애니플러스(Aniplus) 한국어 자막판 동시방영(2011-2012)
인터넷: 니코니코 동화(ニコニコ動画) 한국어 자막판 동시방영(2011-2012)


출연
코야마 리키야(小山力也) … 에미야 키리츠구(衛宮切嗣)
오오하라 사야카(大原さやか) … 아이리스필 폰 아인츠베른(アイリスフィール・フォン・アインツベルン)
카와스미 아야코(川澄綾子) … 세이버(セイバー)
츠네마츠 아유미(恒松あゆみ) … 히사우 마이야(久宇舞弥)
하야미 쇼우(速水奨) … 토오사카 토키오미(遠坂時臣)
세키 토모카즈(関智一) … 아처(アーチャー)
나카타 죠지(中田譲治) … 코토미네 키레이(言峰綺礼)
야마자키 타쿠미(山崎たくみ) … 케이네스 엘멜로이 아치볼드(ケイネス・エルメロイ・アーチボルト)
토요구치 메구미(豊口めぐみ) … 솔라우 누아다레 소피아리(ソラウ・ヌァザレ・ソフィアリ)
미도리카와 히카루(緑川光) … 랜서(ランサー)
나미카와 다이스케(浪川大輔) … 웨이버 벨벳(ウェイバー・ベルベット)
오오츠카 아키오(大塚明夫) … 라이더(ライダー)
이시다 아키라(石田彰) … 우류 류노스케(雨生龍之介)
츠루오카 사토시(鶴岡聡) … 캐스터(キャスター)
신가키 타루스케(新垣樽助) … 마토우 카리야(間桐雁夜)
오키아유 료타로(置鮎龍太郎) … 버서커(バーサーカー)


페이트(Fate) 시리즈는 2000년대 후반 일본 서브컬처의 한 획을 그은 프랜차이즈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타입문(TYPE-MOON)이 제작한 첫 상업용 19금 게임인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Fate/Stay Night)의 유례없는 성공은 곧 무수한 파생작과 애니메이션화로 이어졌습니다. 동서양의 영웅들이 영령으로 소환되어 마술사인 마스터와 함께 소망을 이루어 주는 그릇(願望器)인 성배를 손에 넣기 위해 전투를 펼친다는 바탕 설정은 충분히 재미있을뿐더러 활용할 구석도 많았으니까요.

페이트 제로는 이러한 페이트 프랜차이즈의 시작점(prequel)인 동시에 정점을 이룬 작품이기도 합니다. 페이트 제로의 집필을 맡은 우로부치 겐은 게임 시나리오라는 한계를 보였던 전작과는 달리 장편 라이트 노벨로써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 이를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 CD는 초호화 성우진의 열연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비하면 애니메이션화는 다소 늦어졌는데, 이는 오리지널 작품인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애니메이션 버전의 완성도가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2011년에 와서야 타입문의 또다른 작품인 <공의 경계>를 7부작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바 있는 유포테이블(ufotable)이 페이트 제로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됩니다.

작품은 세계 각지의 마술사들이 동서양의 영웅을 영령인 서번트(servant)로 소환하여 성배를 손에 넣기 위한 싸움, 즉 이른바 “성배전쟁(제4차)”을 벌이는 1990년대 초중반의 9일 동안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에미야 키리츠구는 세계평화의 달성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이를 위해서라면 “소수”의 희생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외면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극단적인 공리주의자입니다. 반면 그의 서번트인 세이버는 영국의 여왕 아르토리아(라틴어 이름에서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이 캐릭터는 아더 왕 전설의 그 아더 왕을 여성화한 인물입니다)로써 캄란의 언덕에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한탄하며 그 비극의 역사를 되돌리고 싶어 하는 정의로운 기사왕입니다.

애니메이션은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합니다. 흔히 이런 부류의 작품들은 화려한 “필살기 효과”와 열혈 대사로 무장하기 마련이지만, 페이트 제로는 성배를 얻음으로써 이른바 “근원”에 도달하고자 하는 마술사라는 변태적인 인물들의 서바이벌 게임을 대단히 냉소적으로, 또 음울하게 묘사합니다. 우로부치 겐은 다른 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본작에서도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의 굴레 아래에서 좌절하고 비통해하는 인간들의 군상을 고전 그리스 비극 식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고결하고 정의로운 성품을 가진 등장인물일수록 비극적인 최후를 맞으며, 모든 이들의 목표였던 성배는 거의 모든 인물들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은 물론, 인간의 어리석음과 불완전함, 그리고 “악”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로 정리됩니다.

이 때문에 본 작품은 흔한 선과 악의 대결구도를 넘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행합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은 최후반부 주인공의 환상을 통해 빤하고 상투적이지만, 동시에 확고한 답을 제시합니다. 이는 너무 정석에 가까운 답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김을 새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본 서브컬처라는 제한적인 문화적 환경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완성도에 가까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장르의 한계란 언제나 있는 법이니까요. 그 점을 감안하면 페이트 제로의 주제의식과 작품 내적인 성취도는 상당히 높은 수준입니다.

본 작품의 감독을 맡은 아오키 에이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영화적인 미장센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흔히 페이트 제로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작화 팀을 갈아 넣은 듯한 액션 신”을 드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보다도 대사를 통한 내용 전달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영화에서 사용되는 여러 화면기법을 동원하여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건조하면서도 시크하게 표현해 낸 연출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물론 이러한 연출은 기본적으로 재패니메이션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제작비 아끼기”의 일환이기도 하며, 몇몇 장면에서는 노골적일 정도로 “액션 신에 돈 써야 하니 여기서는 캐릭터를 최대한 멀리 잡고, 움직이게 하지 말자.”는 의도가 보입니다. 그러나 이를 고려하더라도, 애니메이션으로서 페이트 제로의 전반적인 영상기법은 준수합니다.

성우들의 연기가 굉장히 좋습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고뇌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인 에미야 키리츠구는 코야마 리키야의 절제된 발성과 연기 속에서 훌륭하게 창조되었으며, 세키 토모카즈의 까라지는 웃음, 오오츠카 아키오의 호탕하면서도 결연한 연기, <살인의 추억>의 박현규를 훌륭하게 더빙해 낸 성우답게 탁월한 또라이 연기를 보여 주는 이시다 아키라의 사이코패스 또한 훌륭합니다.

그러나 본 작품에서 가장 훌륭한 연기를 보여 준 성우는 주인공의 아내인 아이리스필 폰 아인츠베른을 맡은 오오하라 사야카입니다. 이 캐릭터는 에미야 키리츠구의 비극과 이중성을 가장 극적으로 비춰 줘야 함과 동시에, 남편의 검은색 이미지와 대척되는 흰색의 이미지를 선명히 보여 줘야 하고, 그레트헨적인 구원의 여성을 연기해야 함과 동시에 최후반부에는 그와 전혀 다른 어떤 역할까지 맡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오하라 사야카는 이 모든 역할을 충실하게 소화하고 있으며, 조금이라도 어긋났다간 그 의미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은 가장 아슬아슬한 장면 여럿을 훌륭하게 넘기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페이트 제로는 “<다크 나이트>에 비견되는 묵직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제작진의 소망을 어느 정도 성취한, 전반적으로 꽤 탁월한 작품입니다. 물론 본 작품은 진짜 <다크 나이트>에 비견할 수준은 못 되며, 원작자의 또 다른 2011년 히트작인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만큼의 완결성은 보여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딱 잘못하면 공허한 그림의 나열이 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중2병스러운 장면의 연속이 될 수 있는 위험을 잘 극복하고 프랜차이즈 시리즈 역사상 가장 훌륭한 영상화를 이루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합니다. 2012년이 끝날 때까지 이 작품에 비교할 수 있는 완성도를 가진 다른 TV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나올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족
잔인한 장면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시청자들에게 죄책감 섞인 즐거움(guilty pleasure)을 주는 불필요한 잔인함은 드뭅니다.

일본 TV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최초로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선행 상영회가 개최되었으며, 표는 매진되었습니다. 철저한 비주류문화의 전유물, 그것도 어두운 분위기의 애니메이션치고는 상당한 흥행입니다.

본작에서 카와스미 아야코와 세키 토모카즈의 연기를 <노다메 칸타빌레>의 노다메/치아키 커플과 비교해 가며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다 필요 없고 내 아내가 되라는 치아키와 이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노다메라는 생각이 한번 드니, 그 다음부터는 이 두 연기자의 모든 커플링 연기가 노다메와 치아키로 자동 대입되어 버려서 한동안 좀 고생했습니다.


관련 링크
공식 홈페이지(http://www.fate-zero.jp/index.html)
영어 위키피디아(http://en.wikipedia.org/wiki/Fate/Zero)
일본어 위키피디아(http://ja.wikipedia.org/wiki/Fate/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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