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 혹사문제는 시대에 따라, 또 투수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달라지고 야구팬들도 이 문제에 민감하기 때문에 단정지어 말하기 매우 어렵다. 그리고 팬과 야구인들, 특히 예상외로 투수 본인의 생각이 많이 다른 사안이기도 하다. 또 팬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다르다. 한 마디로 좋은 "떡밥"인 셈이다.
아무튼 너무 복잡한 문제라서 일단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만.
1. 혹사에는 장사가 없다. 선동열이건 뭐건.
2. 투수들의 짧고 강렬한 활약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오랫동안 건강하게 잘 던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3. 투수 개개인에게는 서로 다른 활용법이 있다. 리오스나 Matsuzaka 같은 선수들을 보호한답시고 공 100개만 던지고 내려오게 하는 것은 혹사 방지가 아니라 자원 낭비이다. 윤학길 같은 투수도 마찬가지다. 선동열이나 구대성도 마구잡이식 기용만 아니었더라면 이 유형으로 꾸준히 오랜 기간 던져 줬을 것이다. 반면 박명환처럼 공 한 개 한 개를 유심히 보면서 관리해야 하는 유형도 있다.
4. 그러나 투수의 유형 판정은 결과론적이다. 영건 시절의 혹사성 기용으로 3년간 부상을 겪었고 일찍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송진우는 쌍팔년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던져 주고 있다. 그렇다면 송진우의 기용법은 집중적이고 세밀한 투구수 관리보다는 어느 정도의 투구수 초과를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활용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이는 송진우의 데뷔시절 "아, 이 투수는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하는 분석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20년간 송진우가 프로무대에서 뛴 결과이다.
임창용은 97년부터 본격적인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99년 그 극심한 타고투저에도 불구하고 투수진이 황폐화된 삼성에서 애니콜 소리를 들을 만큼 종횡무진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무너진 것도 불펜투수에게 닥친 "잠깐의 불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 임창용은 다시는 그 때의 구위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 다음 해의 임창용은 여전히 막강한 마무리였지만 팀의 관리를 집중적으로 받고 있었다(그나마도 "관리를 받는다"는 것이 89이닝이었다. 05년 오승환이 경이적인 스탯을 찍으면서 99이닝을 던졌을 때도 혹사논쟁이 있었음을 생각할 것). 01~03년의 임창용은 팀의 1선발로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고, 04년에는 다시 마무리로 전환하면서 "선진국형 마무리" 스탯을 찍는다(67이닝 2승 4패 36세이브, 그러나 그의 앞에는 권오준이 있었다).
05년 이후의 임창용은 다들 아시다시피.
만일 임창용이 97년부터 160~180이닝 사이에서 적절하게 던져 주는 선발투수였다면 어땠을까.
5. (리그평균 이상 가는)
고졸투수는 대졸투수보다 특히 더 위험하다. 이에 대해서는 굳이 여러 가지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박철순, 선동열, 최동원 같은 호랑이 밥 먹듯 우승하던 시절의 케이스도 있다. 하지만 89년의 박정현, 92년의 염종석, 00년의 이승호(SK)는 호랑이가 그렇게 자주 우승하던 시절은 아니다.
6. 따라서 고졸투수는 비록 매우 잘 던질지라도
데뷔 후 3년차까지는 이닝과 투구수를 관찰해 가면서 어느 정도 관리하는 것이 안전하고, 바람직하다. 그가 완투마당쇠형이든 6이닝형이든. 아, 대졸투수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스스로 완급조절이 가능하고 영리한 투수라는 전제 하에 1년 반 정도는 역시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일정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 투수의 "사용설명서"를 뽑아낼 수 있을 때 (역시 관리하고 점검해 가면서) 완투형 투수로 다듬어도 늦지 않다.
7. 따라서 나는 지금 데뷔 3년차이고, 신인이었던 해와 그 다음 해까지 200이닝을 거뜬히 돌파하였으며, 아시안게임부터 올림픽까지 대회란 대회는 다 나갔고, 기용법은 동일했음에도(감독이 같은 사람이니까) 올해는 지난해의 3/4 수준의 이닝밖에 소화하지 못한 어떤 투수가 상당히 걱정된다. 누구라고 굳이 말하지는 않겠다.
말하면 가슴 아파진다.8. 중간계투 및 마무리요원의 경우는 이닝도 이닝이지만
연투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일주일 동안 2경기 나와서 3이닝씩 길게 던지는 것보다, 매일같이 나와서 1이닝씩 던지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4등 안에 못 들면 바보 소리 듣고(어떤 팀은 4등만 해도 잘린다), 투수층이 얇은 한국프로야구에서 감독들이 연투 지시의 유혹을 이겨내기는 정말 쉽지 않다. 수준급의 불펜투수가 세 명 정도 한꺼번에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불펜 에이스라 불리는 투수들의 과부하는 필연적이다.
어떤 팀은 수준급의 불펜투수가 세 명 나와도 차례차례 병원으로 보내 버리기도 한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라고는 얘기하지 않겠다.
9. 필연적이라고 해서 잘한다거나, 잘못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팬들 중에도 불펜투수 1인의 1년 혹사를 팀의 좋은 성적을 위한 희생으로 기꺼이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포스트시즌 투수 혹사를 당연시하는 사람들도 있다(물론 팀의 1년 농사가 달린 문제이고 투수 개인으로서도 영광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책임은 필요하다. 내가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를 넘어선, 1년 내내 혹사성 기용을 당한 투수를 포스트시즌에서도 1차전 선발 완투, 그 다음날 마무리, 그 다음다음날 다시 선발로 쓰는 행위이다). 현재의 1승과 미래의 10승을 동일시하지 않는 한,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현재의 1승이 중요한 만큼 미래의 10승도 중요하다. 준우승만 여덟 번 했다고 해서 우승 한 번 하자고 투수 한 명 잡는 건 바보짓이다. 단기전의 우승이 투수 한 명과 맞바꿀 만큼,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비록 준우승 여덟 번 한 팀의 팬이긴 하지만.
1993년. 열 살짜리 내 마음 속의 영원한 에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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