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강의 팀 : ② 1994년 LG 트윈스



한 번 이기기 시작하면 도무지 질 것 같지 않던 팀, 1994년 LG 트윈스.


어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에게 "무적"이라는 별칭을 붙이기란 쉽지 않다. "무적"에는 단순히 "적이 없다"는 의미 이상이 있기 때문이다. 무적의 경지는 자기 자신만이 오직 자기의 적이 되는 세계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래에는 자기 자신의 단점마저 극복해 냄으로써 승자가 되는 세계이다. "지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정의로 무적의 뜻을 다 설명하기란 어렵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물론이고 팬들조차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팀, "내가 경기장에 가기만 하면 이기더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던 팀, 2000년 현대의 절대적인 면모와는 달리 가장 화려한 야구를 했던 팀. 1994년의 LG 트윈스는 그런 의미에서 무적이었다.


1994년의 LG 트윈스는 LG는 물론 전신인 MBC까지 포함해도 프랜차이즈 사상 가장 훌륭한 성적을 거둔 팀이었다. 정규시즌 81승은 지금까지 구단 최고기록임은 물론 2000년 현대가 91승을 거두며 깨기 전까지 1992년 빙그레, 1993년 해태와 함께 한국프로야구사상 최고 기록이었다. 또한 이들은 홈 경기에서 45승 18패(.714)라는 경이적인 승률을 올렸는데, 당시 경기장을 찾았던 트윈스 팬들이 "너무 이겨서 재미가 없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일기장에 따르면-_-;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트윈스의 광팬이셨던 이모부의 손을 잡고 16번 잠실구장을 찾았는데, 그 경기에서 트윈스는 12승 4패를 기록했다. 너무 이겨서 재미가 없다는 말은 당시 내 옆자리에 앉았던 20대 커플 중 여자분이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분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팀 기록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진가는 더 확실히 드러난다. 4월 26일 청주에서 벌어진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이기며 1위에 올라선 후 시즌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1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1994년의 LG는 1992년의 빙그레보다 딱 3점 적은 655점을 득점하는 동안 452점밖에 내주지 않았다. 그 결과로 피타고리안 승률은 실제 승률보다도 높은 .666을 마크한다. 이는 어떤 팀에게든 3연전에서 2승을 거둘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팀이었다는 뜻이다. 655점의 득점은 이 해 득점 2위인 해태(563점)보다 거의 100점 가까이 많으며, 452점의 실점은 투수왕국으로 불렸던 같은 해 태평양(471점)보다 적다. 또한 1994년 LG가 기록했던 .643의 승률을 그 이후 뛰어넘은 팀은 1998년 현대, 2000년 현대, 2008년 SK 이렇게 세 팀 뿐이다.



요즘에 비하면 많이 순수한 복장.


1994년 LG를 논할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유지현 - 김재현 - 서용빈의 신인 트로이카이다. 원년을 제외하고 한 팀에서 같은 시즌에 데뷔한 타자 세 명이 그 해의 OPS 랭킹 10위 안에 모두 자신들의 이름을 올린 경우는 2008년 현재까지도 이들밖에 없다. 현재의 프로야구가 1994년 당시보다 수준이 높고 선수층도 두터우며, 대형 신인들이 주로 투수 가운데에서 나온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들과 같은 폭발적인 신인이 한꺼번에 배출될 가능성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들 가운에 아직까지 현역으로 뛰는 선수가 김재현밖에 없다는 것은 아쉬움을 더한다.


부상의혹 속에서 1994년 시즌을 시작한 한양대의 유지현은 이종범을 제외하고 역대 유격수 가운데 가장 높은 단일시즌 EqA(.311)를 기록하였으며,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인 트윈스의 프런트 덕분에 연세대를 뿌리치고 프로에 입문한 김재현은 사상 최초 신인 20 - 20이라는 눈에 띄는 기록과 역대 고졸신인 최고 RC(88.7점), 최고 EqA(.312)라는 눈에 띄지 않는 기록을 동시에 세웠다. 88.7점의 RC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며, EqA 또한 2001년 천안북일을 졸업한 김태균(한화)이 .334라는 폭발적인 수치를 기록하며 갱신하기 전까지 아무도 깨는 선수가 없었다. 서용빈은 앞의 둘에 비하면 평범한(?) 성적을 올렸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 OPS에서 앞서 있던 12명의 타자 중 그보다 어렸던 선수는 같은 팀의 김재현뿐이었으며 같은 포지션에서 그보다 뛰어난 성적을 거둔 선수는 태평양의 김경기(OPS .862)뿐이었다. 프로 통산 6번째, 신인 최초 hit for the cycle은 덤. 당시 LG의 경기는 1회부터 타자 세 명이 북치고 장구치며 기본 1점을 내고 시작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LG 타선에 이 세 명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4년 OPS 상위 20명 가운데 LG 선수들은 6명이나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대화가 있었다. LG 타선의 상징이었던 김상훈에 이병훈을 얹어 내주고 김응용 감독과의 불화로 해태에서 입지가 좁아진 당대의 해결사 한대화를 영입한 것은 어떻게 보면 모험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트레이드는 LG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한대화는 최우수신인상을 수상한 유지현 바로 다음가는 OPS를 기록하며 신인 3인방을 튼튼하게 받쳤고, 김상훈과 이병훈은 주저앉았다. 물론 당시의 해결사 이미지는 막강했던 앞 타자들과 겹쳐지며 다소 과장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대화가 없었더라면 LG와 태평양의 승차는 조금 더 줄어들었을 것이며, 서용빈이 주전 1루수를 꿰차고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2000년 현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강팀의 조건 중 하나는 어떤 슬롯에서도 구멍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탄탄하고 연속적인 공격력이다. 그리고 LG의 라인업에 가장 자주 포함된 9명은 모두 평균보다 뛰어난, 혹은 평균보다 훨씬 뛰어난 공격력을 가졌던 선수들이었다. 8번과 9번에 주로 배치되었던 박준태와 박종호마저 7할 이상의 OPS, (+) 값의 RCAA를 기록한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방위병으로 복무 중이었던 김동수는 규정타석을 다 채우지 못하는 핸디캡 속에서도 8할을 넘기는 OPS를 기록했으며, 5번타자로 주로 기용되었던 "검객" 노찬엽은 부상의 상처를 씻고 수준급의 성적을 냈다. 지명타자로 번갈아 들어선 최훈재, 김영직이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공격력을 보였음은 물론이다.


1994년 LG 라인업의 진가는 수비와 주루에서도 드러난다. 풀타임 5년차 포수 김동수와 그 뒤를 받치던 신인급 백업포수 김정민은 LG 투수들이 압도적인 성적을 내는 데 이바지했고, 서용빈 - 박종호 - 유지현 - 한대화로 이어지는 내야는 수비범위가 좁고 잔실수가 종종 있었던 한대화를 제외하면 리그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훌륭한 수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한대화마저 유지현이 커버함.) 김재현 - 박준태 - 노찬엽의 외야가 내야만 못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84도루라는 비인간적인 기록을 낸 이종범에 이어 51도루를 기록하며 리그 도루 2위를 차지한 유지현과 공동 8위에 랭크된 박종호, 김재현(21도루)을 보유했던 LG의 주루는 이종범 한 명에게 가려졌던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잘 치는 타자 아홉 명만 있었다면 1위는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94년 LG는 리그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팀 역사상 가장 훌륭한 투수진을 보유하고 있었다. 1993년에 투고타저의 바람 속에서 9승 9패 3.76이라는 미덥지 못한 성적을 냈던 2년차 선발투수 이상훈은 이 해 완전히 폭발한 모습을 보여 주며 선동열이 시즌아웃된 한국야구에서 독보적인 탈삼진 능력과 방어율을 과시했다. (물론 이 다음 해의 이상훈은 폭발을 넘어 "대폭발"한다.) MBC 시절부터 나란히 마운드를 책임져 온 김태원과 정삼흠은 이 해 사실상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커리어 사상 최다승을 거둔다. "신인 10승투수" 인현배는 기록으로 보면 다소 과장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인으로서 정규이닝에 거의 근접한 이닝을 소화하면서 리그 평균에 약간 못 미치는 실점능력을 보여 줬던 그의 존재는 LG 마운드를 더욱 든든하게 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94년 LG 마운드의 가장 큰 특징은 역할이 확실히 분배되어 있는 야구였다. 이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나오는 투수, 동점이거나 아슬아슬하게 지고 있을 때 나오는 투수, 간발의 차로 이기고 있는 경기를 마무리하는 투수, 이길 가능성이 낮을 때 나오는 투수로 불펜의 역할을 분배하는 것은 요즘의 기준에서는 상식이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불펜 에이스는 7회, 심하면 6회부터 나와서 이기는 경기를 확실히 "마무리"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겉으로 봤을 때 그저 그런 능력을 갖춘 선수들은 버리는 경기가 아니고서는 등판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광환 감독은 부임 이래 선수들의 능력과 경기상황에 맞춰 투수들의 역할을 분배했고, 어느 선을 넘지 않도록 개인이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나누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뛰어난 투수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에서 본분에 충실했던 차동철, 차명석, 민원기와 같은 선수들은 그 속에서 재탄생했다. 커리어 내내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팀이 원하는 그 곳에서 제 역할을 다했던 김용수가 지키는 뒷문은 든든했다. 튼튼한 1~3선발의 존재가 이런 시도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던 핵심적인 원동력임은 물론이다.


많은 사람들은 1994년의 LG와 당시의 이광환 감독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자율야구", "신바람 야구"라는 수식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에 가까운 시도"가 1994년에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며, 그는 "신바람"이라는 말을 쓴 적도 없다. 경기의 국면국면에 개입하는 작전보다는 선수의 역량과 스타일을 따져 원칙을 결정하고 그것을 그대로 밀고 나가는 그의 야구는 처음 팀에 부임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1992년의 LG, 1993년의 LG, 1994년의 LG는 매 해 다른 모습을 보였고 리빌딩은 성공적이었다. 이광환에 대한 평가는 1994년의 성공보다는 1991년 시즌 종료 후의 LG를 2년여에 걸친 시간 동안 어떻게 바꿔 나갔는가에 중점을 맞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994년의 이광환은 2000년의 김재박만큼이나 화려한 팀을 잘 이끌었고, 정상에 등극시켰다.


2000년 현대가 절대 지지 않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팀이었다면, 1994년의 LG는 "가끔 질 때도 있지만 일단 한 번 이기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절대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유지현 - 김재현 - 서용빈 - 한대화의 활약은 2000년의 우즈 - 김동주 - 심정수에게는 미치지 못하며, 차명석 - 차동철 - 김용수는 오승환, 권오준, 안지만, 박석진이 있었던 2005년의 삼성과 비교하면 아주 낫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모든 것을 더한 1994년의 LG를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팀은 2000년의 현대, 그리고 이 다음에 말할 팀, 이렇게 둘 뿐이다. 



Next up : 1991년 해태 타이거즈



모든 기록은 ISTAT(http://www.istat.co.kr)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by Lucid | 2008/12/13 16:36 | Baseball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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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푸하핫 at 2008/12/13 17:15
야구 본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는 정말 생소할 포스팅이군요 ㅡㅡ;;
Commented by Hadrianius at 2008/12/13 22:01
저 사진 정말 몇 번을 봐도;;
Commented by Reality at 2008/12/14 02:04
94년 LG 덕분에 8살 꼬꼬마이던 제가 LG와 야구를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ㅠㅠ

물론 그 다음해에 마산으로 이사가는 바람에 그 동네 롯데 팬 애들하고 자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만 orz... 그 후 롯데가 세컨드가 되긴 했군요;;

그래서 아직도 제 마음속에는 신인 3인방만큼 큰 존재감을 가진 선수가 없습니다. 아.. 그 시절 LG가 그립네요.
Commented by mochacake at 2008/12/14 14:43
저도 94년 8살때 기억하고 있죠.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 이렇게 신인 3인방과
삼손 이상훈, 노송 김용수만 있으면 평생 우승할거 같았는데..
Commented by Hoyeol at 2008/12/14 20:42
어릴시절 언젠가 말도 안되는 점수차를 뒤집었던 94년의 한 경기를 기억합니다.

안타가 터지고 터지고 터지고 터지고, 급기야 만루홈런.

그때의 폭발력이 아직도 기억에 아스라히 남아있네요.
Commented by 바른손 at 2008/12/15 11:47
잘 보고 갑니다 루시드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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