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과학 밸리로 보내는 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들 정치학이나 사회학을 정치철학이나 사상, 또는 역사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철학과 역사는 사회과학의 중요한 기반이며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는 중요한 학문이다. 그러나 정치학이 정치철학이나 정치사상과 동의어는 아니다. 정치철학과 정치사상은 정치학과 교집합 부분이 분명 있으나 포함관계는 아니다. 오히려 최근의 정치이론연구나 국제정치연구에서는 비록 초보적인 수준으로 쓰이고 있지만 대세는 오히려 수학과 통계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수학적, 통계학적 방법론을 지배적으로 사용하는 사회과학의 대표적인 분야는 경제학이다. 재능있는 수학자와 물리학자, 그리고 보다 엄밀한 방법론을 끊임없이 찾으려 노력한 많은 경제학자들의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더 엄밀하게 정의되고 그 정의의 테두리 안에서 보편성을 지니는 경제학 이론을 가지게 되었다.)
Princeton University의 Math for Political Science 학부용 강좌 syllabus 중 교과서 목록.
집합론, 각종 시리즈와 극한, 공간벡터, 선형대수, 최적화와 미분, 적분, 확률과 통계 등이 주 내용이다.
대학원 이상에서 쓰이는 수학의 수준은 (당연히) 이것보다 높음.
매년마다 발간되는 미국정치학회 글모음집은 물론이고 International Organization과 같은 국제정치학 전문 저널은 이것이 정치학 논문인지, 선형대수 책 수식 appendix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학적 기법을 많이 쓰고 있다.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이나 응용공학처럼 속칭 "heavy math"가 쓰이지는 않기에 선형대수 책이라는 말을 붙였지만, 편미분과 전미분, Taylor series 등 기초적인 대수와 해석밖에 배우지 않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고교 졸업 후 따로 수학을 배우지 않은 문과생이라면 99% 이상 알아먹기 힘들 것이다. 서론과 결론은 어찌어찌 읽겠지만, 그 과정이 이해되지 않으므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 분야가 쓰인다.
1) 대수와 해석 : 이과생들이 고등학교 때 배우는 행렬의 일차변환, 복소수의 극형식, 초월함수의 미적분은 물론이거니와 최소한 편미분과 전미분, 각종 급수, 델타함수 정도는 알아야 볼 수 있는 논문이 적지 않다. 물론 자연과학 쪽 전공자들이 보면 코웃음치는 수준이겠지만.
2) 통계학 : 중심극한정리, 큰 수의 법칙 등 기초적인 방법론과 확률이론부터 시작해서 각종 통계학의 계량적 스킬이 동원된다. 간단한 논문은 상관관계 한 두개 정도 얻는 것으로 끝날 때도 있긴 있으나, 복잡한 것은 수식을 짜는 과정부터도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3) 게임이론 : 특히 국제정치학의 협력이론(cooperation theory)이나 안보론에서 많이 쓰이는 방법론이다. 사회과학에서 큰 발전을 이룬 응용수학의 분야. 물론 경제학에서 쓰는 정교한 게임이론과 아직 1대 1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나처럼 그리 수학에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_-;) 학생들에게는 우울한 일이지만, 이 수리적 방법론이 더 정교화되면서 요구되는 수학의 수준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는 사회과학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는데, 다른 조건이 같다면(!) 사회과학이 자연과학에 비해 변인의 통제가 어렵기 때문이다. 즉, 변수가 많다.
이러한 새로운 조류는 집단지성을 가진 "충분히 많은" 시민들이 이성적인 대화와 토론을 통해 공동의 참(true)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전통적인 정치학의 관점에서 보면 반동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철저히 혁신적이며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미지수이다. 30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가진 이런 분야의 정치학은 오늘날의 한계주의 경제학과 같은 절대적인 입지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일련의 정리(theorem)과 해석으로부터 얻은 결과는 현실정치에서 어떠한 의의를 가질 수 있을까?
미지수는 여전히 많다 ; 따라서, 학문이 진보할 수 있는 범위 또한 여전히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