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정신적 외상(trauma).


나는 2006년 10월에 입대해 2008년 9월에 전역한 육군 예비역 병장이다. 전방에서 근무하지도 않았고, 얻어맞은 적도 한 번 없으며, 소총수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만한 자격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심한 구타를 당해서 한동안 대인기피증에 시달린 사람, 이명 현상 때문에 사회에 나와서도 고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내 군생활은 그냥 병영체험 같은 것이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전역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지금, 군대에 있었던 2년은 내 인생에서 증발한 기간이나 다름없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정말 그렇게 느끼고 있다. 사회에서의 삶은 기억이 생생하고 지금도 이따금 그 때의 좋은 기억 혹은 나쁜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2006년 10월부터 2008년 9월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하고 가끔 잠자리에서 억지로 떠올리려고도 노력한다. 하지만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마치 내 인생에서 그 2년이 통째로 사라진 것만 같다. 또한 당연한 일이지만 군대에 있었던 2년 동안은 사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 때 있었던 사회의 여러 가지 사건이나 이슈에 대해 말하는 걸 들어 보면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전역하고 사회에 적응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시 공부할 마음을 다잡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대학생이랍시고 3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은 2년의 군 생활을 거치는 동안 완벽히 백지화되었다. 한번 손에서 펜을 놓고 2년 동안 다른 세상에서 살다가 다시 돌아오니, 펜을 잡고 책을 읽는 것으로 먹고 산다는 것에 공포를 느꼈다. 내가 다시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 예전 한때처럼 내 전공에 흥미를 느낄 수 있을까? 이런 회의감은 매일 밤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런 현실로부터의 도피하고자 얼마간 막무가내로 놀기만 했다.


내가 그 2년을 사회에서 보냈다면 그 때의 나는 적어도 지금의 나보다는 더 발전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책을 읽었을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며, 더 많은 즐거움을 누렸을 것이다. 물론 군대에서도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군대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용납해야만 했던 불쾌한 기억의 편린이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에 한없이 굴종적이었으며 나중에는 꽤나 이기적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에게 명령을 하고 으름장을 놓았으며 기합을 주었다. 내 선택이 아닌, 국가의 동원에 의해서.


어쩌면 그 2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처럼 느껴지는 건, 2년이라는 시간을 잃어버림으로써 따라 잃어버려야만 했던 수많은 배움과 만남과 경험의 소중한 기회들을 놓친 것을 애써 자각하지 않기 위한 정신적 외상의 발현일지도 모르겠다.


바깥에 비도 오고, 갑자기 좀 우울해진다.  야간근무를 서는 외곽근무자들이 은근히 짜증나고 고생할 날씨인데, 잘들 하고 있으려나.


by Lucid | 2009/02/13 05:31 | Miscellaneous | 트랙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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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억상실증: 바시르와 왈츠를
*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인간은 때때로 그것을 곱씹는 대신 그와 관련된 기억들을 의식에서 지워버리기도 한다. "군생활, 정신적 외상(trauma)"라는 제목의 글(http://lucidian.egloos.com/4064649)을 읽다가 문득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 Waltz with Bashir" (http://www.imdb.com/title/tt1185616/)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 군생활, 나역시 그 지겨웠던 2년이 실은 잘 떠오르......more

Commented by 누리냥 at 2009/02/13 13:56
ㅠㅠ..이미 오래 시간이 지났지만.. 그간 수고하셨습니다(__)
조만간 돌아올 저의 애인님도 비오는 날에 이런 쓸쓸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니 조금 슬프네요^^;
그래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녀석도 저도 힘내야겠지요-
그냥 밸리 돌아다니다 덧글 끄적이고 갑니다-
비오는 꿀꿀한 날이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오후 보내시길 바래요..^^
Commented by 노란나무 at 2009/02/13 14:07
공감합니다. 저만 그런게 아니였군요.
Commented by 앞치마소년 at 2009/02/13 17:33
비맞으면서 3일정도 훈련뛰었던게 생각나서 그런지 비맞는거 좋아했는데, 이젠 싫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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