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킨 가장 큰 화두가 되었던 영역은
경제였다. 노무현 정권 말기가 1997년 말 IMF 사태 이후 한국의 경제적 역량이 가장 최대화되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의 한나라당은 "경제! 반드시 살리겠습니다"를 구호로 내세워 승리했다. 모든 문제는 경제로부터 비롯되었고 국가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다른 영역의 정책은 "경제 살리기"라는 그 목적이 불분명한 지향 아래 배속되었다.
지금도 이 점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지난 1년간 정부를 비롯하여 학계, 언론, 시민사회에서 주목했고 국가 - 시민사회 간 갈등을 일으켰던 문제는
거의 예외없이 경제정책과 관련되어 있다.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공약이었던 한반도 대운하 건설이 전형적인 예다. 그리고 현재 정당정치와 (외교정책에 큰 관심이 없는) 이명박 지지층의 관심은 2008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경제정책에 쏠려 있다: 소위 "슈퍼 추경"을 할 것인가? 일자리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환율정책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공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의 문제(e.g. 교육정책, 언론관계법 개정, 용산 사태)가 이 문제를 뚫고 수면으로 올라올 때마다 대통령을 위시한 행정부는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지지층을 대변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는
경제문제로의 이슈전환log-rolling를 시도하였다: "우리나라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당면한 경제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국가내부 화합을 망그러뜨리는 다른 문제는 경제난의 타개를 위해서는
영원히잠시 묻어 두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은 외교정책에서도 강하게 나타난다. 사실 지난 2007년 이명박 캠프의 주된 관심사는 경제 슬로건을 내세운 확고한 선거에서의 승리였으므로, 대북정책을 비롯한 외교안보분야에 대한 공개적인 입장표명이나 정책제안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주1).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도 꽤나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구체화되기 시작한 <비핵-개방-3000>이라는 그의 대표적인 정책노선은 그래서 흥미롭다. 남북관계를 국가와 국가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김대중 행정부 이후 최초로
상호주의적인reciprocal 전략을 내세운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심히 도와 줬는데도 북한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만큼, 우리도 필요할 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for-tat로 맞서야 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비핵-개방-3000> 노선이 지닌 모종의 위험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비핵-개방-3000>은 "북한이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및 그 제조를 위한 과학기술을 전량 폐기dismantle하고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검증verification을 받으며 최종적으로는 국제사회의 군축안보레짐regime으로 완전히 복귀하면, 적극적인 경제협력을 개시하고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1인당 GDP를 3,000달러까지 끌어올려 주겠다."로 요약할 수 있다. 즉,
북한이 먼저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전면적으로 도와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북한이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혹은, 지난 1994년 제네바에서처럼 포기하는 척 하면서도 나중에 한 방 더 터뜨리기 위해 수작을 부린다면? 혹은 북한이 포기한다고 쳐도 미국-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에만 관심을 가진다거나, 중국의 품으로 기어들어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때 가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북한이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한국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북한 내부의 식량난을 비롯한 모든 남북관계 차원의 문제는 북한 잘못이지 한국의 잘못은 아니다(주2). 즉,
북한이 먼저 개과천선하지 않는 한 우리가 먼저 적극적으로 도와 줄 생각은 없다.물론 북한은 한국의 단독 압력만으로는 당연히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최고 정책결정자인 김정일의 목표를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는 것으로 가정한다면 국제적 고립과 취약한 경제기반이라는 최악의 난국 속에서 정권안보를 유지할 방법은 핵무기 하나뿐이다. 이 핵무기를 포기하라는 것은 사실상 김정일의 1인 독재체제의 기반을 스스로 해체하라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북한에 상상을 초월한 국제적 압력을 가하거나, 김정일 신상의 변화를 포함한 북한 국내정치의 격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현재의 남북관계/북미관계가 유지되면서 북핵을 폐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북한은 1980년대 소련이 아니고, 김정일은 고르바초프M. Gorbachev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교정책과 그에 상응하는 국내정책을 일종의 이중적 게임two-level game으로 본다면, <비핵-개방-3000>은 이명박 행정부에게는 굉장히 유용한 국내정치의 전략적 카드이다. 또한 <비핵-개방-3000>은
대북정책의 실질적인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겠다는, (남북관계와 대북정책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면에서는 무책임한 정책표방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든 이명박 행정부는 국내정치적으로만 보면 크게 아쉬울 것은 없다. 이명박 행정부를 지지하는 시민사회세력의 한 기둥pillar은 냉전의 대결구도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성향의 (그리고 상당한 사회적 자본을 보유한) 유권자들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광명성 2호 발사 시도는 새로운 미국 행정부의 첫 정책을 시험하는 카드임과 동시에, 한국의 대북정책 변화에 곧바로 대응하는 한 수이다. 한국이 더 이상 북한
정권의 존속을 전제로 한 협력과 경제원조를 시행하지 않을 것임을 지난 1년간 선언해 왔기 때문이다. 기존의 수만으로는 뭔가 부족할 때 압박의 지렛대를 하나 더 놓는 것은 외교정책의 상식이다. 광명성 2호의 발사는 단순히 핵탄두를 가지는 것을 넘어서 직접 미국-일본 본토를 타격할 수도 있다는 북한의
군사적 역량(military capability)을 과시하려는 시도이기도 하지만,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를 한국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불행히도 현재 이명박 행정부는 그 다음의 한 수를 미처 준비하지 않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했거나, 혹은 둘 다이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필요에 따라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을 통해 북한을 압박하겠다는 표현을 했고, 국방부는 우발적인 남북의 충돌에 대비하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미사일 문제를 군사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반대한다."고 언급하면서 미-일 공동 안보리 결의를 통한 제재에 무게를 실었다. 이는 한국이 북한 핵 문제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미국과의 노선 공조를 추구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거꾸로 말하면 북핵문제의 해결과 남북관계의 개선을 동시에 추진하려는
지난 10년간의 정책노선을 완벽히 포기하겠다는 뜻이다(주3). 이명박 행정부의 지지자들, 이명박 개인의 남북관계에 대한 인식, 취임 이래 진행되어 온 대북정책의 관성 등을 모두 고려하면 그 의도는 더욱 명백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광명성 2호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의 생각과 정책지향이 서로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가장 과민반응하는 것은 당연히 미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미국은 동맹관계를 고려하여 그러한 일본의 선택을 막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무력을 통해 북한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식의 이중적인ambivalent 태도를 보이고 있다(주4).
중국은 미-일의 한 수를 지켜보면서 이 사안을 이용하여 다른 영역의 이슈에서 미-일에게 얻어낼 것이 무엇인가를 계산하는 데 골몰하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지만, MD문제를 비롯한 유럽 지역에서의 문제가 더 중요하기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다. 6자회담이 시작된 이래 쭉 그래 왔지만,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동상이몽이다.
따라서 북한의 광명성 2호 발사 위협에 대한 이명박 행정부의 대응, 그리고 발사 성공 혹은 실패 후 한국이 취할 노선은 대북정책을 포괄한
이명박 행정부의 외교정책 수행 능력에 대한 총괄적인 시험대가 될 것이며 이후 4년여간의 대북정책을 가르는 분수령으로 작용할 것이다. <비핵-개방-3000>이라는 현상유지 위주의 정책기조 아래에서 더욱 "대범해지는" 북한의 행동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Anything But Kim/Roh의 노선을 광명성 2호 발사 이후에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주변 강대국들의 서로 다른 생각 가운데 한국이 무게를 둘 지점은 어디가 될 것인가? 이명박 행정부는 자신과 다른 접근법을 사용하고 있는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 어디까지 맞춰 주고, 어디까지 자율성울 주장할 것인가? 그 가운데에서 발생할 문제점은?
흥미로우면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원래 앞뒤 가리지 않았지만 근래 갈수록 그 정도를 더하는 조평통의 논조와, 이명박 행정부의 명백한 외교정책의 허점이 이렇게 빤히 보이는데도 그것을 물고 늘어지기는커녕 (실제 단기적인 경기부양에 큰 효과도 없을) 추경 문제를 둘러싸고 아웅다웅하는 민주당의 작태를 보니 이제는 한심하기까지 하다.
주1.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오바마Barack H. Obama 현 미국 행정부의
일본, 중국에 대한 정책구상은 그가 취임할 때까지도 잘 다듬어지지elaborated 않았는데,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선거 직전 미국을 강타한 전례없는 불황이라는 요소가 민주당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주제가 되었다. 둘째, 워커 부시George W. Bush 행정부의 "실패한 외교정책"을 공박하는 데는 아시아-태평양보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러시아의 문제를 따지고 들어가는 것이 낫다.
주2. 여기에 대해서는
sonnet님의 글 참조: "북한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은 저 놈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다."
주3. 사실 이는 <비핵-개방-3000>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다만 광명성 2호 발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일련의 정책적 반응으로 현실화되면서
구체적인 선택으로 고정되었다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주4. 오바마 행정부의 현 대북정책은 일관성이 상당 부분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명박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오바마 행정부 역시 구체적인 로드-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의 방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