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작년 9월에 전역한 이후 꽤 많은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이지만, 영화관에 거의 가시지 않는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덕에 중고등학교 6년 동안 <타이타닉> 딱 한 편만 극장에서 감상했던 내 입장에서는 흡족하다 싶은 정도다. 대충 꼽아 보면 <모던보이>, <도쿄>, <굿바이>, <눈먼 자들의 도시>, <앤티크>, <프로스트 vs 닉슨>, <레볼루셔너리 로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번 애프터 리딩>, 그리고 어제 본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까지 대략 10편 정도.


정리해 놓고 보니 나의 한심한 수준에 비하면 나쁜 영화는 용케 피해가고 비교적 괜찮은 영화를 무난하게 선택했다는 느낌이 든다. 위에 나열한 작품들 중 극장에서 보면서 "이 영화 참 한심하군." 하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은 <모던 보이>뿐이었으니까. 그 반면 <앤티크>는 심장이 오그라들 듯한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대체로 작품의 본래 목적에 충실한 연출을 보인 듯 싶다. 나머지 영화들은 모두 평균 이상이었다. (대놓고 헐리우드식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경험상 대체로 한국영화보다는 외국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이 조금 더 "안전한" 편이다.)


사실 나는 최근 외화 관람의 포인트를 오히려 내용보다는 한국판 제목에 두고 있다. 최근의 영화 배급사들은 기개가 없어진 탓에 예전처럼 용감한 한국식 제목을 붙이기보다는 영어 원제를 한글표기로만 옮기는 경향이 두드러져서 재미가 없지만, 열 작품 중에 한 작품 정도는 원제를 초월하는 제목을 갖다붙이는 경우가 있어서 즐겁다. <굿바이>는 원제가 영어식 일본어였음을 고려하면 상당히 잘 된 번역이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경우는 지나치게 안정을 추구한 번역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한편으로 들긴 하지만, 원제를 살려 놓으면서 한국의 관객들에게 친절하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칭찬을 해 주고 싶다. 이 영화는 책을 읽어주는 남자에 대한 영화랍니다, 하는.


반면 <번 애프터 리딩>과 같은 제목을 들으면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영어 원제를 봐도 읽고 나서 불태우라는 말인가? 아니면 읽고 나면 화가 난다는 뜻인가? 혹은 읽고 나면 죽여주게 재밌는 얘기다!라는 건가? 하고 헷갈리는데, 그걸 한글로 곧이곧대로 옮겨 놨으니 그냥 봐서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용감하게 <웃기는 스파이 소동>이라든가 <한심한 첩보요원> 같은 제목을 붙였다면 재미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긴 <브래드 피트의 번 애프터 리딩> 같은 제목을 붙이지 않은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최근의 외화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한국어 제목을 붙인 작품은 단연 <Vicky Cristina Barcelona>가 아닐까 싶다. 사실 이 제목은 영화의 내용을 아주 정직하게 대변하면서도, 작품 전반에 흐르는 관조적인(혹은 3인칭 소설에서 느껴지는 관찰자의 느낌) 시선을 상징하는 문구이다. <E.T.>의 네이밍 센스가 100점 만점이라면 이 작품은 적어도 95점쯤은 된다. 나는 우디 앨런의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고 그의 개인적 성향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이 제목을 붙여 놓고서는 꽤나 흡족해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아마 크리스티나(Christina)라는 이름에서 h를 뺀 Cristina를 주인공 이름으로 정한 것도 치밀한 계산의 결과였을 것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쉬크함에는 역시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다. <보그> 지에서는 이걸 한 수 배웠으면 한다.


그런데 한국 배급사 쪽에서는 뜻밖에도 이 영화에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이런 기가 질릴 정도의 과감한 모습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원인은 뭔가 발전적이고 창조적인 제목을 붙일 의욕이 없었을 거라는 점이다. 아예 3류 같은 제목을 붙여서 가벼운 분위기를 이끌어 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한심하다. 어떤 분의 말씀처럼 차라리 <좌페넬로페크루즈 우스칼렛요한슨>으로 바꾸는 편이 훨씬 낫다. <스칼렛요한슨 바르셀로나 가다>도 괜찮겠다. 하지만 원제를 최대한 적게 훼손하는 범위 내에서 고치려면 역시 <비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좋을 것이다. 어감도 나쁘지 않고 외우기도 쉽다. 이걸 일본 식으로 <아길레라쨩>이라고 하면 왠지 귀여워서 좋다.


여하튼 제목을 잘못 붙인 덕에 밀리언셀러가 될 수 있었던 <비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한국에서 제일 크다는 코엑스 메가박스 멀티플렉스에서도 금요일 저녁타임에서 배제되는 굴욕을 당했다. (어째서 나랑 동갑인 스칼렛 요한슨이 이다지도 팔리지 않는 걸까?) 그 굴욕을 씻어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돈 주고 극장에 들어가니 내 자리 바로 앞에 대여섯 명쯤 되는 여고생들이 줄줄이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목 아니면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배우에 낚인 듯 싶지만, 혹시 어른용 영화를 보러 다니는 조숙한 아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약간은 들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이런 영화를 보러 왔을까, 활발해서 좋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 아이들 덕분에 영화관람은 매우 즐거웠다. 나도 아직 상당히 젊은 편이지만, 아무래도 감수성이 10대 시절보다는 무디다 보니 웃긴 장면에서 웃음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고, 뭔가 심상치 않은 장면에서도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얘네들은 전혀 다르다. 우디 앨런 영감이 툭툭 던지는 나레이션 하나에도 까르르 웃고, 하비에르 바르템의 느끼한 연기에는 즉각 반응을 헀다. 심지어 페넬로페 크루즈와 스칼렛 요한슨의 ★☆약속의 HOT LESBIAN KISS SCENE★☆이 나올 때는 단체로 악악 소리를 질렀다. 영화가 끝나자 그녀들은 거침없이 영화에서 얻은 교훈과 느낌을 꽤나 큰 소리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야 이거 뭐야, 내 친구 커플한테 보여주고 싶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
"금발머리가 스칼렛요한슨 맞지? 아우 이쁘다 >ㅁ<"
"뭐야 완전 이해 안돼 부부끼리 잘 살지 왜 셋이서 그짓하고 그래?"


이런 얘기를 듣고 있자니 영화에서 우디 영감이 부분부분 쏘아대듯이 털어놓는 여러 가지 집요한 질문에 대해 공감을 적잖이 했던 내 자신이 바보스러워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맞아. 부부끼리 잘 살면 되지 셋이서 그짓하는 건 정상인이 진지하게 생각할 일이 못 되지. 어린 나이에 그런 놀라운 통찰력을 갖고들 있다니 대단한데. 역시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기 시작하면 영화의 섹시함을 제대로 즐길 수 없겠어. 덕분에 잘 웃고 잘 즐겼다. 고마웠어 얘들아.


아무튼 영화 자체는 꽤나 즐거웠다.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까지를 위한 <트와일라잇>이랄까. 결혼을 안 해 봐서 결정적인 부분에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즐거움의 추구를 저렇게나 쿨하고 예술적으로 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분명 하비에르 바르템이 처음 등장할 때 잘 나가는 예술가가 아니라는 말을 비키의 친척 아주머니가 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느긋하게 살고 있어서 놀랍긴 했지만. 분명 후안 씨는 세금 납부라든가 피임을 위한 콘돔 착용이라든가 자기 작품의 판매 따위에는 초연한 진짜 예술가가 틀림없다. 부러웠다. 진짜로.


이것과는 별도로 이 작품에서 얻은 교훈도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쿨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영어를 잘 해야 한다.
2. 스페인식 기타 연주는 분위기에 약한 여자를 낚는 데 직빵이다.
3. 채워지지 않는 사랑이야말로 낭만적이다. (안 언풀퓔링 럽흐 컨 비이 로우맨튁An unfulfilling love can be romantic.)


정리해 놓고 보니 역시 한 편의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역시 영화를 볼 때는 그 십대 여고생들과 같은 <아길레라쨩>의 마인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우디 영감도 그 편을 훨씬 더 좋아해 줄 것이다. 여담이지만, 봉준호나 박찬욱의 영화에는 그런 <아길레라쨩>의 마인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서 피곤하다. 내가 여성적이고 유약한 심성과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별 이유도 없이 옥상에서 기역자로 죽어 있는 여고생을 보여 주거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간지나는 베이스톤의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보다는 <아길레라쨩>이 훨씬 낫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걸 보면 <추격자>는 도대체 어떻게 봤나 싶다.


추신: <비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음악은 굉장히 매력적이고 훌륭하다. 특히 영화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바르셀로나>라는 노래는 독특한 이국적 향취를 풍기고 있어서 좋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 여성 보컬이 바르셀로호나아~ 하고 외치는 부분은 왠지 좀 촌스러운 것 같아서 웃긴다. 이런 점에서는 페넬로페 크루즈의 노발대발하는(!) 스페인어를 보고 까르르 웃었던 내 앞자리 여고생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원곡을 찾아보니 Giulia e Los Tellarines의 Barcelona라는 곡이라고 한다.







페넬로페 크루즈의 풍성한 긴머리스타일은 참 마음에 든다. 스칼렛 요한슨보다 예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by Lucid | 2009/04/25 17:27 | Miscellaneous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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