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례와 민중의례


그냥 묻는다. 이 두 개가 어떻게 동일선상에서 평가될 수 있는가?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물론 둘 다 "안 했을 때 이상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제식군기에 목숨을 거는 군대에서 국민의례를 할 때 받들어 총을 하지 않는 이등병은 선임으로부터의 갈굼은 기본이고, FM대로 하면 영창감이다. 요즘은 그런 색깔을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내가 다니는 대학교의 단과대학에서 20년 전쯤에 집회에 참가하기 전 결의(?)를 다지면서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한 놈이 - 집회에 참가하는데도! - 부르지 않고 멀뚱하게 보고만 있다면 그것 또한 그 당시 기준으로는 "까일" 만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두 의례 중 어느 의례가 더 직접적인 강제의 상황을 연출하는가의 문제보다는, 두 의례의 성격이다. 그리고 두 의례의 성격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어느 쪽이 더 강제적인가"의 문제 또한 그런대로 답을 낼 수 있다.


국민의례는 근대국가 시스템의 역사적 산물이다. 즉, 국가가 폭력의 배타적 독점을 기정사실화하고, 국민국가nation-state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국민을 탄생시키기 위해" 고안한 여러 신성한 장치 중 하나가 국민의례다. 국민교육헌장과 같은 것은 그 중에서도 독재정권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그 의도를 드러낸 유치한 실패작. 사실 이것은 이제는 지나가는 중학생도 다 알 만한 "상상의 공동체" 류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길게 쓰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기도 하다.


민중의례는 국민의례의 전제에 대해 부드럽게 말하면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이 고안한 개념, 거칠게 말하면 지난날 한국의 독재정치 시스템을 비판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만든 반대의 개념이다. 따라서 민중의례는 국민의례와 동일선상에서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민중의례가 국민의례와 동일선상에 비교되려면


1) 현대의 국가만큼이나 태어날 때부터 그 정체성을 귀속시키는 강한 공동체가 있고 2) 그 공동체가 자기 조직의 모든 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민중의례를 시행하며 3) 만일 민중의례에 거부감을 느끼고 정치적인 행동을 통해 반대의사를 밝히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를 "반공동체적인 인간"으로 간주하고 공동체 내부에서 처벌하거나, 공동체 외부로 몰아내는 프로세스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한 20년 전쯤에는 2번 조건은 충족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민중의례는 죽었다 깨어나도 국민의례의 가장 기본적 성격인 1번을 충족시킬 수 없다. 민중의례는 안 하면 그만이다. 옛날식으로 팔뚝질을 하고 비분강개한 어조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행동이 못마땅하다면 그냥 앉아 있어도 된다. 만일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야말로 파시스트다. 원글의 댓글대로 어떤 조직에서 한 사람이 민중의례를 거부했다고 그 조직에서 쫓겨나거나 실질적인 불이익을 받아 정상적인 제도권 내에서의 생활이 불가능해졌다는 이야기가 네이버 뉴스캐스트에 올라갈 확률은 지극히 낮다.


반면 군대라는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학생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다가 퇴학 조치까지 당하고 법원이 교장의 결단력을 옹호한 전력이 있던 국가가 한국이다. 한국을 제외하면 가장 국가적인 이념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만한 미국의 국기에 대한 맹세도 한국처럼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는 표현까지는 쓰지 않으며, 초등학생들에게 시키는 학교가 있고 시키지 않는 학교가 있다. 차라리 "God"을 가지고 뭐라고 하겠지.


한줄요약: 국민의례와 민중의례는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도 어려우며, 오히려 "폭력성"은 국민의례에 더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by Lucid | 2009/10/23 16:40 | Junks | 트랙백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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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sianote at 2009/10/23 16:48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다가 퇴학당한 사례는 77년 사례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재판이 열린다면 퇴학취소처분이 취소되겠지요.
Commented by Lucid at 2009/10/23 16:51
지금은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는 지켜져야 한다는 관점보다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서 국민의례를 왜 거부하냐는 관점이 더 지배적일 것 같네요.
Commented by teferi at 2009/10/23 17:19
국가의 폭력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국가가 폭력을 쓰지 않는다면 군벌과 범죄자들이 폭력을 자행할 거라는 것을 왜 모를까요?
Commented by Lucid at 2009/10/23 17:28
죄송합니다만 글을 잘못 읽으셨어요.

저는 국가의 배타적 폭력독점 그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만큼 울트라 자유주의자도 못 되고 무정부주의자도 못 됩니다. 오히려 국제정치를 전공으로 삼을 만큼 현실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글 어디에 국가가 폭력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표현이 들어 있나요? 제가 비판하는 것은 "한국의 국민의례"가 내포한 폭력성이죠.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국가는 폭력을 독점해 왔다.

한국의 경우 국민의례는 그러한 폭력독점의 과정에서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고안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그런데 한국의 국민의례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정당한 과정을 통해 독점된 폭력을 운용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경우(=독재)에 더 강조되어 왔으며, 헌법상 보장되는 여러 기본권과 배치되는 경우에도 유보조항을 통해 그 강제성을 확산시켜 왔다.


그리고 teferi님의 국가의 존재 의의와 국민의례의 존재 의의를 동일시하시는 관점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이네요.
Commented by Lucid at 2009/10/23 17:32
댓글을 쓰고 보니, sonnet님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저에게도 "사상검증"을 하시지는 않을지 약간 걱정되는군요. 부디 저한테는 그러지 말아 주세요.
Commented by teferi at 2009/10/23 22:55
Lucid님 말대로 폭력독점자체는 매우 정당한 것입니다. 문제는 폭력의 정당성인데 지금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은 민주적 절차와 법제도에 의해 정당하게 행사되고 있기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폭력독점을 옹호하는 국민의례는 정당합니다.
Commented by 비여우 at 2009/10/23 17:46
좋은 글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Lucid at 2009/10/23 18:56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想翔 at 2009/10/23 17:49
발생학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심리학적인 측면에서도 둘은 전혀 다른 것 같은데- (특정한 상황에 대한 가정 없이) 둘 모두 (똑같이) 폭력적이다. 라고 가정하는 건 올바르지 않은 것 같아요. 다만 몇몇 포스팅은 어쩌면 그리고 아마도 민중의례를 경험하지 못했거나 그 의미에 관해 생각할 기회를 전혀 갖지 않은 무지 혹은 무경험의 소산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개인적으로는 아고라에서 저걸 부를 때 흥얼거리기만 하고 입을 열지않는 불온분자(?)였고, 야구장에서도 종종 앉아서 애국가를 들으며 선수들을 기웃거리는 빨갱이(?)지만 말이죠. ㅎㅎ
Commented by Lucid at 2009/10/23 18:58
무지와 무경험은 그래도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 대한민국 국민 전체로 확대시켜 보면 아마 민중의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10%도, 아니 5%도 안 되겠죠. 그렇지만 원글쓴이처럼 저렇게 단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저 자신이 상당히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하는데요. 주류경제학을 지지하고 국제정치에서는 거진 현실주의의 편에 서 있으니~ 그런데 한국이라는 나라가 참 독특해서 이런 사람까지 뭐 하나 말하면 "빨갱이"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좀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 가끔은 화도 나고요.
Commented by Hadrianius at 2009/10/23 20:18
민중의례는 처음 보는데 강제성이 한눈에 봐도 없어 보이는데..;

저는 이러한 주의를 외칠 정도로의 철학이 없기는 한데, 이상하게 제 직감은 위 쪽이 훨씬 폭력적이라고 가리키는군요. 그냥 보이는게 그래요.

그리고 단순하게 의례의 내용만 읽어도 나오는 위와 아래의 결정적 차이...
위는 아무리 봐도 너희는 이러하다라고 강제하는 것이고 아래는 이러한 사람들은 나오라 하고 권유하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위에서 무조건 시키고 때려박는 문화에 거부감이 심해서 그런지 차이가 확 띄네요.
Commented by Lucid at 2009/10/23 23:49
민중의례의 거의 전부라고 할 임을 위한 행진곡 자체가 80년 광주의 기억으로부터 나온 산물이니까요. 그나마 "조국과 민족"이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는 점이 발전이라면 발전이겠지만요.
Commented by blue ribbon at 2009/10/23 20:58
의례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됩니다.
주류경제학이 천민자본주의에 비슷하니.
Commented by Lucid at 2009/10/23 23:48
외람되지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Picketline at 2009/10/23 21:29
우리는 졌습니다. 논쟁의 프레임이 '국가가 국민의 자율적인 행사 의식조차 금지하는 것이 옳은가'에서 '민중의례는 파쇼인가'로 넘어가버렸습니다.

Commented by Lucid at 2009/10/23 23:48
그냥 이야기하는 거죠. 졌다고 하기는 반대쪽의 논리가 너무 빈약한데요?
Commented by noname at 2009/10/23 22:56
앗, '앞서서 나가자던'이 아니라 '한평생 나가자던' 아닌가요? ㅎㅎ

그러고보니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본지도 오래 되었네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 3학년때까지만 해도 교양학교 입학식&졸업식 같은 거 할 때 민중의례 꼭 했었는데ㅋ

'민중의례는 파쇼인가'라고 묻는 이들은 어쩌면 '민중의례는 파쇼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걸지도요. 말씀하신대로 민중의례에 집단적 강요가 따른다거나 처벌 등의 강제성이 수반된다면 그건 파쇼로 가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ㅎㅎ

역시나 저는 편협한 인간인지라, 저런 말을 하는 이들은 민중의례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용감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Commented by Lucid at 2009/10/23 23:47
맞네요. 이놈의 기억력이란 ^^;

한 20년 전이면 모를까, 이제는 집단적 강요 같은 것하고는 아주 거리가 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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