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이 책을 추천하고 싶어졌다. 아래는 YES24의 서평 중 잘 된 부분을 뽑아 온 것.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마태, 27:24-25.”
1961년 4월, 아돌프 아이히만(A. Eichmann)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살상하고,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신체적인 파멸로 이끄는 상황으로 몰아갔으며, 그들에게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해를 끼친 혐의로 ‘유대민족 전체’에 의해 예루살렘 법정에 기소된다. 6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역사상 유래 없는 엄청난 피해자 수에 모두 어처구니없었지만(인간은 자신의 이해력을 벗어난 문제에 대해서는 역설적으로 관대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다음해 5월 사형당하기 직전까지 아이히만을 관찰한 세계는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그의 과거 행적들은 물론 소름끼쳤지만, 재판을 받고 있는 실존 인물로서의 그는 일상적이며 평범할 뿐 악마 같지도 않고 기이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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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아이히만은 자신이 결코 반(反)유대주의자가 아니며 살인을 피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므로, 자신 또한 국가의 명령에 충실한 죄밖에 없는 피해자라고 주장하였다. 관료제의 톱니바퀴 속에서 자신이 판단할 기회를 상실한 채 시키는 대로 복종하기,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빌라도 총독과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체계적으로 학살하고 유대인종을 말살하려는 제3제국 히틀러의 정책은 어떻게 가능했으며, 심지어 가해자에게 죄책감을 느낄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별다른 저항 없이 효과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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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법치주의의 외양 속에서 합법적인 명령을 실행하고 있다는 믿음은 악(惡)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없애버렸다. “지도자의 의지는 최고의 법”과 같은 슬로건 아래서 국가 최고 통치자인 히틀러의 명령은 법적 효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유대인 학살과 같은 명령을 거부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오히려 그것이 정상적인 법적 틀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합리화할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재판에 의해 드러난 가장 우려할만한 점은 바로 ‘판단의 상실’이다. 관료제는 몰락하는 개인 판단의 아주 부분적인 예일 뿐이다. 관료제의 비인간화와 더불어, 우리의 도덕 역시 이와 비슷해져 간다. 공공에 위험한 것, 평등을 위험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많고 적게 있는가 하는 것, 이것이 적게 나타날수록 그것은 ‘선’이 되며 반대의 경우 ‘악’이 된다. 개인들의 판단 역시 집단의 기능이 되며, 또 오로지 기능으로서만 개인의 판단은 가치 있는 것으로 된다. 따라서 집단에 의해 허용된 ‘사상의 자유’가 아닌 자신을 고양하는 것, 자신을 표현하는 것 등은 이제는 공동체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충분히 훈육되고 길들어져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우리는 한편으로 삶에서 모든 위험한 것들은 제거한다는 미명 아래 자신의 사유를 확장시키지 않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집단에서 설정한 ‘선’과 ‘악’을 너무 쉽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실제로 집단을 통해 사유하는 것은 판단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성 뿐 아니라, 잘못을 저질렀을 시 위험을 모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쉽게 유혹으로 다가온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이뤄진 일이기에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악’은 이렇게 발생한다.
예루살렘 재판이 아이히만에게, 아니 수많은 독일 국민에게 요구했던 것은 다름 아닌 ‘개인 판단’의 필요성이다. 집단적인 광기 속에서 유대인을 ‘악’한 것으로 몰아붙이며 살해하고 그것을 법적으로 정당화 할 때, 이 때 필요한 것은 법을 준수하는 착실한 집단의 판단이 아닌,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거부할 수 있는 개인의 판단이다.
그때의 판단은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다른 것으로 손가락질 당할 때에도 그것이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개인이 아닌, 스스로의 판단을 창조할 수 있는 개인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