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9일. 고통스러운 나날

나름대로 공부를 정말 꽤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험은 잘 보지 못했다. 평균은 나왔는지 모르겠다. 시험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 시험을 준비하기도 전에 이번 학기에 쓰기로 한 복수전공 졸업논문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 목차도 미처 짜지 못했다. 30분 동안 머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참고서적 하나 보지 않고 대충 짜서 들어간다. 타이핑을 하면서도 이게 졸업논문인지 단편소설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나 좀 까였다. 기분이 씁쓸하다.


논문을 본격적으로 작성할 시간은 물론 아직 주어지지도 않는다. 주전공 졸업논문 관련 교수 면담이 내일이다. 워낙 바쁜 선생님이라 약속을 잡는 것도 힘들었다. 다음 학기에 나를 지도해 주실지는 아직 모른다. 레퍼런스로 책 몇 권의 챕터 하나씩을 읽고, 예전에 공부한 것들을 채워 넣기는 했지만 핵심적인 분석틀은 몇 년 전에 유학을 떠난 선배가 학부졸업논문에서 적용했던 이론을 보고 동일하게 만들어 본 것이다.


물론 사례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사건의 전개과정이 다르며 따라서 당연히 결론도 다르게 나오겠지만 내 학문적 창의성이 거의 제로가 됐음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듯 해서 너무 고통스럽다. 선배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학과 수업에서 배운 내용이고, 나도 들어 봤고, 선배가 미국 학자들의 개념에 대한 논의를 참고하고 변형하여 적용해 본 셈이긴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자꾸 나의 독자적인 아이디어가 아닌, 남의 아이디어를 훔쳐 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자책감이 너무나도 크다. 내일 또 깨질지도 모르겠다.


논문계획서를 쓰고 나니 정신없이 다음 과제가 기다린다. 고등교육재단 세미나 독서과제. <과학혁명의 구조> 번역이 하도 개판이라 반 읽다가 때려치웠다. 대신 예전에 과학철학 수업을 들을 때 정리해 둔 노트를 참조했다. 물리학에 대한 상식 레벨도 못 되는 궤변만 늘어놓은 것 같다. 이런 것도 독후감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나는 과학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셈인가. 그럭저럭 여유있게 한 장은 썼지만, 개운함이 없다. 역시 졸업논문들 탓일까.


다음주 월요일에는 전공과목 시험이 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입할 필요는 없는 과목이지만 공부 자체는 거의 되어 있지 않다. 3일만에 벼락치기로 시험을 봐야 하는데, 객관식이 50%의 비중을 차지하는 시험이라고는 해도 이건 전공과목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불행 중 다행으로 노트정리는 깔끔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얼마나 잘 공부할 수 있을까.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학문적 재능이 있는 걸까. 그냥 암기기계에 학점 따는 귀신이 되어 버린 건 아닐까.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by Lucid | 2009/10/29 23:03 | Daily life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lucidian.egloos.com/tb/426539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at 2009/10/29 23:5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난의 at 2009/10/31 02:42
이런 글이 누군가를 추스리게 할 수도 있군요. 고맙네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이전 다음 >>